To 선아
문득 돈까스가 먹고 싶어졌어. 네가 그랬었잖아. 한가한 토요일 오후에 난데없이 무언가 먹고 싶을 때는 먹어야 한다고. 왜냐하면 일요일 내내 후회할 지도 모르니까. 토요일의 일들을 후회하기는 일요일이 너무 아까우니까. 주중의 것들을 후회하기도 벅차니까. 그래서 나갔어. 가장 평범해 보이는 돈까스집을 골라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돈까스를 주문하고 가장 평범한 모양으로 잘라서 평범하게 한입씩 베어물었어. 내가 요즘 그래. 평범해지려고 애쓰고 있어. 네가 내 곁에 있을 때 나의 일상은 매분 매 초가 특별했는데, 네가 떠나고 나니 네가 없는 매분 매 초가 또 나름 특별해. 이제 내겐 평범이란 남의 일인것 같아서, 그게 조금은 겁이 나서 일부러 애써. 평범해지려고.
접시를 하얗게 비우고 나와서 서점에 갔어. 극장 아랫층의 서점. 책을 고를 때마다 상상하곤 해. 언젠가 한번은 책이 나를 골라주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까. '나를 좀 읽어줘' 하고 속살을 활짝 펼치며 내 앞에 떡하니 책 한권이 나서는 그런 만화같은 일이 내게 생길까. 그런 일은 절대로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몰라서 나는 서점을 한바퀴 돌았어. 어떤 책에도 촛점을 맞추지 않은 채. 자기개발서들이 시위하듯이 모여있는 곳을 무심히 지나쳤고 비타겐슈타인이 숨어있는 철학 서가를 돌아 문학에도 딱히 눈을 주지 않았어. 컴퓨터 책들은 말할 것도 없지. 눈꺼플을 클릭할 틈도 없이 각종 기술서적들의 숲을 빠르게 헤쳐나갔다가 문구점에서 잠깐 쉬었어. 그러니까 생각나더라. 널 만나기 전의 나의 버릇.
항상 서점에 들르기 전에 상영 시작이 한시간 정도 남은 영화 표를 끊었어. 주머니에 티켓을 넣고 서점을 어슬렁거리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두가지 일을 하고 있다는 남모를 뿌듯함에 젖곤 했거든. 그래서 얼른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 시간만 보고 표를 끊었다. 평범해지려고. 한 시간 뒤에 내가 볼 영화는 오블리비언이었어. 쟤는 코에 상처가 났을 때가 젤로 멋있더라. 하며 네가 속삭였었지. 그 때 그 극장에서 코에 상처가 난 탐크루즈를 보며 내 귀에 이 말을 속삭였을 때 왼쪽 귓바퀴에서부터 번져나가던 네 숨결의 자극이 너무 짜릿해서 나는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 너와 가까운 내 몸의 왼쪽은 내내 소름이 돋아있었고 너와 먼 내 몸의 오른쪽은 땀이 났었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해도 내가 선뜻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한건 내 몸의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닌 곳에 있는 어느 부분이 창피할정도로 크고 딱딱해져있었기 때문이야. 청바지를 믿고 일어설 수없을 정도로.
나는 짐짓 심하게 감동받은 듯 정말 멋진 영화라고 말했어. 자리를 뜰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영화라고 말했어. 선아야, 그게 내가 네게 처음으로 했던 거짓말인거 아니?
다시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 오블리비언이 뭘까 하고. 망각 또는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 라는 뜻이더라. 아 이건 내게 필요한 영화일까. 내겐 망각이 필요하잖아. 망각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영화의 힘에 기대볼까. 나는 얼마 전에 기억상실과 망각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되었어. 기억상실은 자동사고 망각은 타동사야. 망각은 어떤 특정한 기억을 버리려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망각하려 하는 그 순간에 오히려 그 특정한 기억을 복습하게 되더라. 기억이 더 깊어지고 생생해져. 망각하려 할수록. 그래서 그냥 평범하려 애써야해. 평범함 뒤에 망각이 덤으로 주어진다면 행운이고 아니면 말고.
영화 속의 잭 하퍼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안고 살아. 지워졌어야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기억. 과거의 기억은 존재 그 자체야. 선아야, 나는 요즘 시간을 거꾸로 바라보는 것 같아. 혹시 너도 지금 그럴까? 사람은 미래를 위해 사는게 아니더라. 너와 헤어지고 나서 알게 됐어. 이런 걸 알아가는게 참 싫어. 하지만 저절로 알아져.
사람은 과거를 바꾸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더라. 미래는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랜덤하게 내게 다가와. 미래는 거부할 수 없어. 시간에는 브레이크가 없으니까. 하지만 과거의 일들은 내 기억 속에서 쉼 없이 변해가. 과거의 기억이 변해감에 따라 현제의 내 존재도 변해. 너와 함께했던 날들이 아름다와보이는 순간은 현제의 나 또한 아름답고 그렇지 않을 때는 현제의 나 또한 그래. 모든게 추해보일 때 가장 견디기 힘들어.
잭 하퍼는 숲 속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그 곳에 과거의 물건들을 모아놓고 과거의 음악을 듣고 과거의 옷을 입어.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에. 모순되는 기억들을 정당화하지 않으면 괴로워지거든. 통일되지 않은 기억은 심하면 정신분열에 이르기도 해. 더 심하면 다중인격을 만들기도 하고. 기억은 존재 그 자체니까. 나의 기억이 나 자신이니까. 내가 지금 평범하려고 애쓰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거야. 과거의 일들을 어떻게든 평범한 것들로 만들고 싶어하니까. 그래서 과거의 일들이 나를 기쁘게 하는 순간들을 포기하더라도 과거의 일들이 나를 괴롭게 하지 않게끔 하려고.
영화에서는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싸워. 잭 하퍼와 지구에 남은 반란군은 지구에 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들의 싸움은 자신의 기억을 정당화하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개인의 존재가 밑바닥부터 흔들리거든. 선아야 우리가, 언제부터 다른 기억들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는 많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우리는 서로 다른 기억들을 가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어느 때부턴가 자신의 기억만이 옳다고 주장했어. 이상하지? 영화에서처럼 외계인이 나의 기억을, 너의 기억을 바꿔놓은 것도 아닌데. 어쩌면 내가 나의 기억을 포기하고 너의 기억을 받아들였다면 우린 같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었을까?
책 하퍼는 반란군의 기억을 받아들여. 그 전까지 잭 하퍼에게 지구는 에너지를 회수하고 떠나야 할 곳이었는데 반란군의 기억을 받아들이고 나니 지켜야 할 곳이 되었어.
우리가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된 이유가 서로에게 했던 거짓말 때문이었을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으면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쌍동이처럼 같아질까? 지금이라도 네게 전화해서 내가 네게 했던 모든 거짓말들을 다 털어놓아야 할까. 그러면 내가 너의 기억을 받아들이고 네가 나의 기억을 받아들여서 예전처럼, 나는 네게 지켜야 할 사람이 되고 너 또한 네게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 될까. 황폐해진 일상을 평범하게 꾸려나가려 애쓰는 나도 다시 네게 지켜야 할 지구가 될 수 있을까. 잭 하퍼에게는 우주선의 블랙박스라도 있었는데 선아야, 우리의 블랙박스는 뭘까. 우리 연애의 블랙박스가 있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의 기억이 다시 같아질 수 있을까. 선아야, 우리는 어쩌다 잭 하퍼와 비카처럼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채 헤어졌을까.
잭 하퍼는 테트를 폭파시키더라. 테트가 심어놓은 지구에 대한 잘못된 기억에 대한 망각이지. 테트의 코어는 폭파되기 직전에 잭 하퍼에게 이렇게 말해. I'm you God. 테트는 잭 하퍼에게 일종의 신이었어. 잭 하퍼의 기억을 만들어주었으니까. 사람의 과거를 통제할 수있으면 신이 될 수 있어. 사람은 그래. 점쟁이가 몇가지의 과거를 넘겨짚기만 해도 웬만한 사람들은 점쟁이를 믿어버리잖아. 그건 그저 과거의 것일 뿐인데 말이야. 잭 하퍼가 부러워. 신을 폭파시킬 용기를 가졌으니까. 나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어. 잭 하퍼는 비록 자기가 죽더라도 자신과 같은 기억을 가진 52번째 잭 하퍼가 존재하잖아. 하지만 나는 네 기억 속에도 온전하게 남아있지 못할것 같아서 신에게 정면으로 대들만한 용기도 없어. 그래서 잭 하퍼가 매일매일의 순찰을 반복하듯 매밀매일의 일상을 평범하게 반복해, 선아야.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 지구를 지키고, 지구에 남은 사람들을 지켜서 결국 서로가 가진 지구에 대한 동일한 기억을 지켜내. 선아야, 우리도 그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너도 나도 서로 모르는 곳에서 서로 모르는 방법으로 평범하게 살다보면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과 공간들이 한 없이 평범해져서 결국은 서로 비슷해지기라도 할까. 개울 바닥의 조약돌들이 닳고 닳아서 결국은 서로 비슷한 둥근 모양을 가지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선아야,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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